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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미소

경주 괘릉1(원성왕릉)

-괘릉(원성왕릉)을 찾아서-

 

 

 제       목▶경주시 문화유적지 괘릉

 종        목▶사적 제26호

 명       칭▶경주 괘릉

 분         류▶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고대

 수 량/면 적▶75.372㎡

 지정(등록)일▶ 963.01.21일

 소    재  지▶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

 시        대▶삼국시대  //소 유 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경주시

 

 

 

괘릉은 낮은 남쪽 울창(鬱蒼)한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785~798)의 무덤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원성왕의 성은 김 휘는 경신(敬信)이며 제17대 내물왕의(12대)후손으로( 백과사전에는 10세손으로 되어있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하고 벽골  재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릉 주위 12지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릉 12지상 중에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이다.다음기회에 사진을 담을 생각...-

 

 

 

 

-탱주 옆 물빠짐 도랑이 있다. -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시체를 그대로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걸 괘자를 써서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흑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능 아래는 능의 보호를 위한 병풍석이 있는데 12지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현명하게 보인다.

 

 

                                                       -판석에 새겨진 무늬는 코끼리 눈 무늬-象眼紋상안무늬, 저너머 괘릉초가 보인다.-

 

원성왕(통일신라 왕) [元聖王, 김경신, ?~798] 그럼 이쯤에서 그는 누구인가? 궁금하다.

 

신라의 제38대 왕(785~798 재위).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일길찬 효양(孝讓)이며, 어머니는 계오부인 박씨(繼烏夫人朴氏:또는 知烏夫人朴氏)이다. 비(妃)는 김씨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아들 인겸(仁謙)·의영(義英)·예영(禮英)과 딸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을 두었다. 780년(혜공왕 16)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하고 혜공왕을 죽인 뒤,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왕위다툼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에 있었고 그때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너오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의 큰 자리는 본래 인모(人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내세우지 못하게 함이 아닌가?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본래 덕망이 높고 인군의 자격이 있다"고 하여 만장일치로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얼마 안 있어 비가 그치고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쓴 뒤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아찬 여삼(餘三)의 해몽을 따라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올렸더니 알천의 물이 불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왕위에 오른 경신은 고조부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 증조부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明德大王), 어머니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선덕왕의 생부)의 2묘(二廟)를 없애고, 시조대왕(始祖大王:味鄒尼師今)·태종대왕(太宗大王:武烈王)·문무대왕(文武大王)·흥평대왕·명덕대왕을 5묘(五廟)로 했다. 785년(원성왕 1)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고, 788년 독서3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해 관리를 등용했다. 790년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 발해와 통교했다. 원성왕 때 와서 신라 하대 권력구조의 특징인 왕실친족집단에 의한 권력장악의 틀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왕과 왕자를 중심으로 좁은 범위의 근친 왕족들이 상대등·병부령·재상 등의 요직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그뒤 왕위를 이어서 하대 원성왕계로 불린다.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785년 승관(僧官)을 두었으며,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또는 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798년 12월 왕이 죽으니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시신을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해설: 다음 백과사전>

 

 

-신라 38대 원성왕릉-

 

 

  

괘릉(원성왕릉) 입구에들어서면 화표석 1쌍이 동서로 서 있고 안쪽으로 가면서 무인상 1쌍,

 문인상 1쌍, 돌사자 2쌍이 차례로 왕릉을  지키고 있으며 왕릉 앞에는 혼유석이 놓여져 있습니다 . 

 

화표석 1쌍

무인상 1쌍

 문인상 1쌍 

 돌사자 2쌍

 

촬영: 2011. 01. 22. 괘릉..  

PhotoGraphed by 이난희 

Canon EOS 5D Mark II
EF24-70 F/2.8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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